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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푸르나 그 마지막 이야기 (Last story in Annapurna)

Mutinath(3760m)-Jonsom(2710m)-Pokhara(620m)

묵티나트에서 내려가는 길의 자콧마을

묵티나트에서 이틀을 묵었다. 첫 번째 이유는 맡긴 빨래가 안 말랐기 때문이지만 토롱패스를 넘었으니 이젠 서두를 이유가 없다. 그리고 몸도 여기저기 쑤시는 것이 움직일 마음을 싹 가시게 한다. 아니 어제 그 이미지가 아직 남아있어 내심 이젠 어떻게든 내려가기만 하면 될 뿐 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담배 한 갑 사러나갔다가 독일인 친구를 만나 장소를 옮겨 한 참을 얘기를 한다. 저녘에 돌아와 보니 숙소 주인이 날 찾았다고 한다. 왜? 하고 물으니 애기를 하고 싶어서 그렇다고 한다. 같은 아시안이라 편했던 것 일까? 커피 한 잔 시켜 밤 늦게 까지 두런두런 얘기들을 나눈다. 그러다 자기 방을 구경 시켜 준다. 한 쪽에는 갖가지 화장품들이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고 거울에는 어렸을 때 부터 찍어 놓은 사진들이 순서대로 붙여 있다. 바닥에는 오래된 양탄자가 깔려 있고 천정에는 알전구가 화려한 전등갓 밑에 달려 있다.

누가 그랬던가?
방은 주인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낸다고, 꼭 그런 분위기의 방이다. 내가 굳나잇 하고 인사를 하자 이번에는 내가 원하면 언제든지 들어올 수 있다고 덧 붙인다.
이잉! 작업들어 오는 건가! 아서라 아서! 난 지금 도시가 그립다. 그래도 싫지 만은 않다.

혼자 다니는 여성 여행자는 현지남성으로 부터 밥도 얻어 먹고 짜이도 얻어 마실 수 있다.
혼자 다니는 남성 여행자는 현지여성한테 말 붙이기도 쉽지 않다. 더구나 사리를 입은 여성이라면..
그러고 보면 아시아 남성은 어딜가나 찬밥이다. 아무리 날고 기는 여행자도 서양인 여성과 같이 다니는 것을 보진 못했다. 아주 드물게 남미나 스페인 정도돼 보이는 히피 비슷한 여성은 보이지만 그저 식성이 특이하다 정도로 치부되어 버리기 일쑤이다. 아시아 남성 스스로가 만든 것인지 아님 원래 부터 그런 것인지....

대충 방향으로 짐작해 보니 저 언덕을 몇 개 넘으면 금단의 땅 무스탕이 나온다. 아직까지 외부인의 발길을 쉽게 허락하지 않는 땅 무스탕. 이곳 묵티나트와 자콧, 카크빼니, 좀솜을 일컬어 Lower Mustang이라고 한다. 오래 전 무스탕왕국이였지만 지금은 100년 전에 한 일본인이 다녀와 만든 작은 박물관을 빼고는 그 자취를 찾기 조차 힘들다. 여기서 부터 30km 북쪽으로 가면 무스탕왕국이 있다. 중간중간 어떤 곳일 까 궁금해 물어보고 다녀도 다녀왔다는 사람은 아직 못 봤다. 다들 한 입으로 비싸다고만 한다.

10일간 돌아볼 수 있는 퍼밋만 700불이 소요되며 개인에게는 허가 자체가 안 나오니 아마도 가이드 그리고 포터등을 포함하여 우르르 몰려 다녀야 할 것 같다. 확실히 히말라야 근처는 길도 길이지만 아예 허가서를 받기가 힘든 곳이 많다. 그나마 가능한 것이 인도 동북부의 시킴지역과 티벳 쪽이 배낭여행자들에게 적당한 가 보다.

저 언덕을 넘어 부지런히 가면 이삼일 안에 무스탕에 도착할 수 있을 듯 싶다.

가는 길에 검문이 있겠지, 모르지 지금은 비수기이니..

아서라 아서! 뭔 생고생을 할려고 준비도 없이 저길 혼자 가냐.

<사진>묵티나트에서 본 무스탕 쪽

다시 떠날 준비를 한다. 이젠 내리막 길이다. 조금 내려가더니 그림 같은 마을 자콧이 보인다. 자콧을 지나면 길은 넓어져 투벅투벅 내리막 길을 걷는다. 묵티나트를 지나도 아직까지 티벳 고원이 남아 있다. 군데군데 초록의 나무도 보이지만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무채색의 고원이다. 그러다 강이 보인다. 처음 시작할때는 마낭까지 마르샹디강을 끼고 올라갔지만 내려올때는 칼리 간다키강을 끼고 내려간다. 물이 다른 셈이다. 모르겠다. 흐르고 흘러 뱅갈만으로 가 바다와 하나가 될지.


좀솜으로 내려가는 길에 있는 까크베니
밀인지 보리인지 누렇게 익어 수확을 앞두고 있다.

한 세시간 쯤 걸었더니 그림같은 마을 카크베니가 멀리 보인다. 이곳을 추천하는 사람들이 많다. 갈까 말까 망설이다가 결국 또 갈 길을 재촉한다. 나로서는 아쉬움이 없는 셈이다. 듣기로는 이 근처에 사과 과수원이 유명하다고 하는데 그 맛을 보려면 아마 가을이나 되서야 가능할 것 같다.

아직 몬순이 시작이 안 된 것일까? 카투만두에 있을 때는 매일 비가 왔었던데 강바닥은 허옇게 그 속살을 드러내고 있다. 강바닥을 따라 걷기도 한다. 군데 군데 실개천이 나오면 짐검다리를 따라 건너기도 하고 그러다 좀 큰 물이 나오면 다시 산비탈 등산로를 탄다. 이곳 부터 길이 생각보다 안 좋다. 그리고 바람이 꽤 매섭다. 한 번은 꽉 조인 모자를 훌렁 벗겨 날려버린다. 다행히 낭떠러지로 떨어지지 않고 중간에 걸려 서둘러 집는다. 바람이 세찰 때는 균형을 잡기 어려울 정도이다. 길은 비탈길에 간신히 걸을 정도로 나 있어 이 때 세찬 바람이 분다면 위태위태 할 정도이다. 이거 내리막길이라고 만만히 봤다가는 큰 코 다칠 것 같아 다시 마음을 단단히 잡는다.
아예 강바닥을 따라 계속 걸을 걸 하는 후회도 생긴다. 물을 만나면 양말을 벗고 건너면 될 것을...

드디어 좀솜에 도착한다. 좀솜은 아마 안나푸르나 지역에서 가장 큰 마을일 것 같다. 식당에 드디어 냉장고도 보이고 헉! 피씨방도 있다. 물어보니 시간당 만 오천원이다. 이거 몇 시간 사용하면 비행기 값이 뽑힐 듯 싶다. 그리고 여기에는 포카라로 가는 비행기가 있다. 아직 결정을 못 했다. 내친김에 가격이나 물어 보자고 몇 군데 항공사에 들려 알아 본다. 사설 항공사는 63불이고 국영항공사인 로얄 네팔은 52불에 공항이용료인 165루피(약 3000원)가 추가된다.-내국인은 외국인에 비해 1/3 가까이 줄어든다.-뭐가 다르냐고 했더니 똑 같다고 한다. 참 나!

망설인다. 좀솜에서 걸어내려 간다면 빠른 루트인 베니까지 3-4일이 걸리고 푼힐을 거친다면 5-6일은 잡아야 한다. 비행기를 타면 20분이면 포카라 까지 간다.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러다가 갑자기 내일 점심엔 삼겹살을 먹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혀 끝에서 오랜 기억을 더듬어 노릇노릇하게 익은 삼겹살의 맛이 기억나 군침이 고이기 시작할 때 그냥 표를 사고 말았다.

숙소에 들어가 엽서나 쓰기로 한다. 안나푸르나에 와서 산 엽서 몇 장이 있어 내려가기 전에 쓸 참이다. 그러고 보니 나도 엽서를 받아 본 적은 딱 두번 뿐이다.
2년 전 인도에서 만난 대학생한테 한 번, 그리고 3년 전 라오스 여행할 때 만난 일본 여행자한테 받아 본 것이 전부이다.
둘 다 답장을 쓰지 못했다.
뭐가 그리 바빠 답장도 못 썼을까?

그 때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한 책무 일지도 모르겠다. 요즘은 한 달에 몇 통씩은 꾸준히 보내고 있으니 취미 아닌 취미인 셈이다. 그냥 그 누군가가 먼 곳에서 날라온 엽서 한 장이 하루에 작은 기쁨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 하나 뿐이다.

베트남에서 만난 대학생은 나한테 특별 주문을 했다. 자기는 눈을 한 번도 못 봤으니 눈 쌓인 모습의 엽서로 보내 달라고 했고 캄보디아 에서 만난 영어 선생님은 이메일로 이제 아빠가 되었다고 자랑을 해 엽서를 보내 준다고 약속을 했다. 어차피 쓰는 얘기가 내 얘기지만 두런두런 쓸 때는 기분이 좋다. 물론 우체국에 가 붙일때는 이게 과연 제대로 갈까 라는 의심이 들지만 어쩌랴! 그 엽서 팔자지!


아침에 일찍 일어나 공항으로 나간다. 뭐 사실 이름이 공항이지 학교 운동장 보다 조금 큰 규모의 활주로가 있고 작은 건물 한 두개가 전부인 셈이다. 좌석이 정해져 있질 않으니 일찍 가서 왼쪽창가에 앉을 셈인데 여기도 세월이다. 7시에 출발할 예정인 비행기는 9시 10시가 지나도 보이질 않는다.
옆 사람에게 물어보니 자기는 여기서 나흘째 기다리고 있는 것이라고 한다. 포카라에 바람이 많이 불어 비행기가 뜨고 있지 못한다고 한다. 언제쯤 올지 안 올지를 알 수 있냐고 물으니 점심때 쯤 방송을 한다고 한다.

그 때 창밖으로 비행기 한대가 보인다. 우르르 사람들이 창가로 몰리더니 누군가가 '고르카, 고르카' 하고 소리를 지른다. 그러자 대기실의 반 정도는 만세를 부르고 난리고 나머지 열 댓명은 시무룩한 표정이다. 그래서 좀 비싸더라도 사설항공사를 이용하는 건가? 누군가 또 얘기를 한다. 10불을 더 내면 저 비행기에 탈 수 있을 거라고 나는 됐다고 대답한다. 삼겹살 먹지 말라는 얘기인가 싶어 오늘 비행기가 안 오면 걸어내려갈 생각을 한다.

그러다 1시간 쯤 더 지났을 때 또 비행기 한대가 보인다. 이번에 사람들이 '로얄네팔, 네팔' 하고 소리를 친다. 내 비행기다. 사람들이 날 잡고 악수를 하고 난리다. 4일을 기다렸으니 그럴만도 하다.
나는 다시 생각한다.
음! 삼겹살을 먹을 수 있겠군!


<사진> 포카라와 좀솜을 오고가는 산악용 경비행기 조종석과 외부 모습

아쉽게도 구름이 잔뜩 끼어 안나푸르나의 제 모습은 보여주지 않는다. 비행기는 약 20여명이 탈 수 있는 작은 규모의 경비행기이다. 여승무원도 있어 승객들에게 솜뭉치와 사탕을 나누어 준다.
좀 더 오래 탔으면 좋으련만 비행기는 20분 정도 지나자 포카라공항에 너무 쉽게 착륙을 해 버린다.

나는 시내로 나와 맨 처음 인터넷방을 들리고 두번째는 한국식당에 들린다.

혼자 한적한 산길을 투벅투벅 걸어대겠다고 한 달 예정으로 트래킹을 떠났건만 채 보름이 안되어 다시 사람들의 숲 도시로 돌아온 셈이다.

누가 그랬던가? '한 발자욱 다가서면 외로움이 보이고 멀어서면 그리움이 남는다고...'

여하튼 삼겹살은 참 훌륭했다. 그래서 행복하다.


토롱패스 근처의 파노라마....사진을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그래도 이 길에 대한 기억은 평생 간직 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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